불모지에 선 연구자, ‘골리앗’ 간암에 돌을 던지다
불모지에 선 연구자, ‘골리앗’ 간암에 돌을 던지다
  • 박성래 기자
  • 승인 2018.09.0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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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한광협 교수

구약성경에 나오는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은 최고 전사들 간의 단독결투를 통한 승부를 주장했다. 키가 3m나 되는 골리앗의 위세에 눌린 이스라엘 군에서는 싸울 전사가 없었다. 이때 골리앗에 맞서겠다고 나선 이가 목동 다윗이다. 이스라엘의 사울왕은 그에게 갑옷과 무기를 주려 했지만, 다윗은 물맷돌을 집어 들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이처럼 변화의 가능성은 다윗의 물매처럼, 새로운 수단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그 새로운 수단 자체가 아니라, 그의 믿음과 용기를 보고 함께 싸운 전사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새로움의 등장보다 가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사람들의 일상에 새로운 습관으로 자리 잡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기자가 만난 한광협 교수는 각 분야 전문가들과의 꾸준한 협업으로 ‘가망 없는 병’이라 불리던 간암을 32% 생존율까지 올려놓은 간 분야에 있어 세계적 권위자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조율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하모니는 그가 간암이라는 골리앗과 싸울 수 있었던 비장의 무기였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한광협 교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한광협 교수

다학제간 소통과 협업으로 개척해온 ‘최초’의 길

지난 1986년 의사의 길로 들어선 후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광협 교수를 가장 많이 수식한 것은 ‘최초’라는 단어다. 소화기내과 간 분야에 있어 세계적 권위자로 손꼽히는 그는 간암의 불모지였던 한국 의학계를 전 세계 간 분야를 선도하는 리딩그룹으로 이끌어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교수는 최근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7 연세의학대상’ 수상의 영광을 누리는 한편, 2015년도 고등학교 ‘진로와 직업’ 교과서 의사직업군 멘토로 소개된 바 있다.

암 사망 원인 세계 3위, 국내 2위 반열에 오른 간암은 그만큼 위험하며, 까다로운 암이다. 한 교수는 1990년대까지 5년 생존율 10% 미만인데다 암이 이미 진행된 환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치료법조차 밝혀져 있지 않아 의사로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환자들을 살리겠다는 열망은 그가 지속해서 연구에 매진하게 한 힘이다. 그는 간암의 조기진단과 예방에 대한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위험 요인을 고려한 개인 맞춤형 조기진단법 확립에 성공했다. 이후 그가 공동연구자로 참여하고, 국내 임상연구를 주도하여 개발한 간암 치료법 ‘홀미움 국소 요법’은 그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한 교수가 센터장을 역임하고 있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간 센터(이하 간 센터)는 개소 2년 만에 병원을 대표하는 융합진료센터로 성공적인 자리매김을 끝마쳤다. 길을 찾아 헤맨 끝에 길을 만들어낸 것이다. 간암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각 분야 간 조화로운 협업을 통해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간 센터는 소화기내과, 간담췌외과, 이식외과, 영상의학과, 방사선종양학과, 종양내과, 병리학과 등 다학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간암 문제에 있어서는 뛰어난 한 사람이 아닌 최고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방사선 치료와 간동맥을 통한 국소적 항암주입의 병합치료법(CCRT)’ 역시 다양한 학문간 협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간암에 방사선을 도입한 병합치료로, 수술이 불가능하던 환자의 16.9%를 수술로 완치를 기대할 정도의 결과를 이끌어내며 6개월 미만이던 간암 환자의 평균수명을 현저히 호전시켰다. CCRT 치료법은 현재까지 활발히 활용되고 있고, 그 효과에 대한 입증자료를 꾸준히 구축하며 타 병원으로 확대 보급할 방침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얻기까지 그의 아내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종양학과 성진실 교수와의 협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아내와 함께 간암에 대해 연구하게 된 것은 ‘축복’이라 말했다. 대화 속에서 미처 몰랐던 점을 발견하기도 하며 서로의 연구를 응원해왔던 부부다. 현재 성진실 교수는 간암 방사선 치료 분야에서 세계적 선도 개척자로 인정받으며 대한간암학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이밖에도 한 교수는 국내 최초로 방사선동위원소를 이용한 간암치료 신약 허가임상 주도$$$상용화에 성공하며 미국 의학교과서인 Harrison에 새로운 간암치료법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국내외 학회지에 4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고, 100회 이상 국제학회와 해외 유수대학에서 초청강연을 진행하는 등 간 분야 권위자로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후발주자에서 세계 리딩그룹으로 우뚝 선 한국의 간암 연구

‘개척’의 사전적 의미는 ‘거친 땅을 일구어 논이나 밭과 같이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듦’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분야를 처음 걷는 사람을 ‘개척자’라 칭한다. 험난한 길을 다듬어 고르는 과정은 고통과 역경이지만, 한광협 교수에게는 즐겁고 가슴 한쪽이 뿌듯해지는 일이다.

“간암은 다양한 분야와 연결되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누구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병이었습니다. 위암 초기에는 외과의사가, 진행 후에는 내과에서 치료하는 것과 달리 간암은 외과의사가 관여할 수 있는 폭 자체가 좁죠.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20%에 불과하거든요. 전 세계 그 어떤 나라를 찾아봐도 간암이 이미 진행된 이후에는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교수가 간암에 관심을 갖던 때만해도 일본 의학계가 간암에 있어 가장 앞서있던 시기였다. 그는 국내 의료진의 90%가 간염이나 간경변환자 진료의 연장선상에서 간암을 다루던 시절이라 간암에 대한 충분한 내용과 정보를 전달받기는 힘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과 교류하며 나눈 지식들은 그가 계속해서 새로운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교수는 발기인으로서 간암연구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이는 현재의 대한간암학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한국 의학계가 전 세계 간 분야를 선도할 수 있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다.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간암에 관한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다. 그 결과 1990년대까지 한 자릿수에 머물던 간암 5년 생존율은 2014년 32%로까지 높아졌다.

기존 간 분야에서 선두를 지키던 일본의 경우 내과에서 시술과 사진판독 등 간암 치료에 있어 수술을 제외한 모든 분야를 담당했다. 한 교수는 단기적인 간암환자 진료에는 유리한 방법이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효율성이 떨어지는 방식이라 지적했다.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각 분야별 숙련된 전문가가 필요하며, 이러한 전문가들이 협업할 때 보다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간암 치료를 위해 일본을 찾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세계에서 한국으로 수술방법이나 이식방법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정도로 한국의 간암 진료분야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한 교수는 한국이 이렇듯 간 분야 선도그룹으로 성장하기까지 시대적 흐름도 한 몫을 했다고 평가한다. 간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도입되던 시기인 만큼 최초로 시도할 수 있던 것도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통을 중시하는 그의 연구관이 빛을 발했다. 연구 중에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논의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이는 더 많은 기회로 이어졌다. 한 교수는 2008년 첫 출범한 국제간암학회(International Liver Cancer Association)에서 초대 집행이사를 역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동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라 말했다.

집행이사를 2년 간 역임한 이후 그는 2010년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간암학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본, 중국 의사와 함께 초대 공동의장을 맡고 아시아태평양 국제간암연구회(Asia Pacific Primary Liver cancer Expert meeting, APPLE)를 창설했다. 이곳에서 그는 초대 아태간암학회 조직위원장 자격으로 2010년 제1회 APPLE meeting을 인천에서 개최하였고 2013년 부산에서 두 번째 학회를 유치한 바 있다. 이밖에도 대한간암연구회 회장, 대한간학회 이사장, 대한내과학회 기획이사 및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탁월한 리더십을 선보여 왔다. 한 교수는 이렇듯 한국을 넘어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과 소통하는 이유에 대해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서’라 답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주변에 같은 목적과 방향을 가진 동반자가 서로의 경험과 성공의 비결을 공유한다면 연구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러한 소통은 그가 지속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간암의 가장 좋은 치료제는 예방과 조기진단

한광협 교수는 간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후반에는 결국 간암으로 연구가 귀결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 간염 등으로 자신을 찾았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간암으로 진행되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30년 간 많은 환자들을 지켜봐온 만큼 간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기진단과 예방이라 말하는 한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가 방송출연과 저술 등으로 간암 예방과 조기진단에 대해 알리는 것 역시 간암 생존율 향상에 있어 예방과 조기진단보다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위험인자가 밝혀져 있는 만큼 치명적인 간암은 사전에 예방할 수 있지만, 침묵의 장기라 불리는 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간암은 위험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한 교수는 간암의 병기에 따라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후학들과 협력해 다양한 연구를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그는 연세의대 내과주임교수로서 후학양성에 힘써 왔으며 한편 간암 명의로서 ‘간암완치보고서’, ‘간장병 홈케어’ 등의 저술 외에도 방송출연과 신문기고로 간암 예방에 힘을 보태고 있다.

“임신 5개월 반의 산모에게서 간암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를 희생하고 산모를 살려야 할까요, 산모를 포기하고 아이를 살려야 할까요? 이는 제가 맞닥뜨렸던 선택의 순간이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묻곤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산모를 살린다는 결정을 내렸죠. 이후 그 환자는 간암을 완치하고, 예쁜 아기와 함께 저를 찾아왔습니다.”

모두가 포기한 간암 환자에게 항암 치료를 시작할 당시에는 그 역시 큰 기대를 걸지 못했다. 워낙 간암이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치료 후 그 환자는 완치라는 기적적 결과를 맞이했다. 그는 기존의 경험만으로 환자를 너무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의료진으로서 그가 맞닥뜨리는 수많은 결정에 해피엔딩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간암이 완치된 후 매달 약물치료를 위해 한국을 찾던 재일교포의 치료를 일 년 만에 중단했을 때, 그 환자가 맞은 결과는 뇌로의 전이였다. 한 교수는 섣부른 결단은 환자를 잃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지금까지도 깊이 되새기고 있었다.

 

‘혼자’가 아닌 ‘우리’라는 오케스트라처럼

“간암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환자라는 인식입니다. ‘우리’가 다 함께 치료해야할 환자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전문분야와 능력이 아닌 환자에게 적용할 최적의 치료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우리 ‘팀’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 늘 염두에 두고 전 세계 각 분야 전문가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의학도의 역할입니다.”

한광협 교수는 임상적 연구뿐만 아니라 기초 연구 역시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소통하며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있는 그다. 그는 이제 정년까지 남은 3년 남짓의 시간 동안 간암과 관련한 진료 분야에 대해 보다 깊이 연구하며 못다 한 과제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또한 그간 개발에 성공했지만 보급되지 않은 다양한 치료법들이 임상에 적용될 수 있도록 연구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간 학회와 교실에 저의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에게 충실하며 저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죠. 인생 2모작에는 인문학에 대한 공부 등 제가 가보지 못한 길에도 들어서고 싶습니다. 물론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환자와 후학들 곁에서 저의 역할을 다해야죠.”

간암 불모지에서 희망의 싹을 틔운 그의 연구는 소통과 화합이라는 두 개의 축을 기반으로 탄탄하게 구축되어왔다. 각자의 자리에 충실할 때 가장 아름다운 하모니를 자랑하는 오케스트라처럼 그와 후배 의료진들이 다학제적 소통과 화합으로 간암 환자들에게 선사할 제2의 삶이라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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